#프롤로그
벌써 4년 전이다. <굿바이, 디스크>라는 제목으로 브런치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메일과 인스타 DM을 받고 있다. "지금은 어떠세요? 운동만으로 완치가 되나요? 통증이 있을 때도 운동하셨어요?" 등등 허리병 환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이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며 느끼는 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또 성실히 사는 분들이 디스크로 많이 고생한다는 것이다. 일과 삶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업무나 혹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러다 보니 몸은 늘 긴장 상태고, 앉아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들.. 이런 분들은 결국 병원에서 만난다. 그렇게 잠 줄여가며, 휴가 아껴가며 열심히 번 돈 다 병원비로 탕진. 부장님 앞에서 옴짝달싹 않고, 앉아서 일해봤자 돌아오는 건 "자넨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하냐" 핀잔뿐이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과로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다가도,
잘 나가는 친구들이 다 디스크 걸린 건 아니잖아요"
그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7살 봄,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기자'라는 명함을 받게 된 순간부터 김연지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나'는 사라졌다. '기자로 성공하는 삶'만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잠은 죽어서 자는 것', 이는 당연한 진리였다. 기자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다들 말하는 성공한 여성 반열에 끼고 싶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바라는 대로 돼 있을 줄 알았다.
다이어리에는 하루하루 해야 할 to do list로 가득 찼다. 24시간을 쪼개고 쪼개가며, to do list를 지워가기를 반복했다. 물론 절반도 채 지우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몸은 미치도록 피곤한데 잠자리에 들면 불안감이 밀려왔다.
"오늘 왜 이렇게 한 게 없지.."
안 그래도 늘 부족하기만 한 잠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보려 하지만 이번엔 머릿속에서 오늘 있었던 온갖 부정 구름이 가득가득 메워진다.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왜 그 선배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내일 다시 말씀드려볼까? 아니야 괜히 더 안 좋아질 거야"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나 메신저 알림을 놓칠까 조마조마하는 것도 수면을 늘 방해했다. 기자라는 직업 탓에, 전화기는 손에서 놓고 지낼 수가 없다. 사건 사고에 예고가 있다면, 사건 사고가 아니지.
물리적으로 하루 1~2시간 정도밖에 잘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수습 때다. 자정 무렵 마지막 보고를 마치고 귀가하면 새벽 1시, 씻고 이리저리 하다 보면 새벽 2시. 새벽 5시 첫 보고를 하려면 최소 새벽 4시에는 도착해야 하기에, 새벽 3시엔 나가야 한다. 어떻게 이렇게 살았냐고? 이때는 그나마 집에라도 갈 수 있었던 때다. 수습 총 4개월 동안 두 달은 경찰서에서 먹고 자고, 집에 갈 수 있는 시간은 딱 24시간만 주어진다. 예를 들어 금요일 오후 7시에 귀가 명령이 떨어지면, 토요일 오후 7시 나와서 보고해야 한다. (이는 2011년에 벌어진 일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론 교육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냥 늦잠 잤다고 하고 혼나고 말라고. 어떻게 사람이 한두 시간만 자고 버티냐고. 그러다 병난다고. 하지만 당시엔 선배한테 깨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때라, 비몽사몽 한 상태로 그렇게 집을 나섰다.
그러기를 4개월. 사실 수습 두 달째부터 생리가 끊겼다. 월경 주기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딱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렸다. 수습 끝난 뒤에야 겨우 병원을 다닐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오는 24시간의 휴식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 그렇게 약을 복용한 지 4개월 정도 지나자 '찔끔' 피가 비쳤다. 10대 때부터 생리통이 워낙 심했던 터라 매달 찾아오는 생리가 너무너무 끔찍이도 싫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고개를 쏙 내민 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정말이지 엄청난 생리통에 시달렸다. 이때 응급실 갔을 걸? 밤중에 너무 아파서..
수습 기간은 그렇게 끝났지만, 체감적으로는 허리디스크로 병가를 내기 전까지, 수습 아닌 수습 기간은 계속됐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쓸데없이' 열심히 했다. '열심히만' 했다. 효율보단 의욕이 앞섰고 열정은 지나쳤다. 대책 없는 부지런을 떨었다. 선배, 상사의 지시는 반드시 모두 처리해내야만 능력 있는 기자가 되는 줄 알았다. 회사에서 예쁨도 받고 싶었다. 적어도 "쟤는 참 예의 바르고 싹싹해. 성실하지"라는 말은 들을 줄 알았다.
잠은 사치였다. 취재하고 기사 쓰다 보면 퇴근하고 나서도, 집에서도, 주말에도, 노트북만 두들기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 사실 한 번쯤 못 받을 수도 있다. 그래, 좀 혼나면 어때. 다음에 또 잘하면 되는걸. 그러나 나는 전화 한 통도, 메신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의지와 상관없이 놓친 적도 많다. 그러면 또 깨지고, 난 스트레스받고, 더 긴장하고.. 정말이지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사는데 어떻게 몸이 버틸 수 있었을까.
모든 걸 다 잘하고 싶은 마음. 사람들한테도 잘하고 잘 보이고 흠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 허리병을 달고 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것 같다.
결국, 정확히 4년 뒤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았고, 또 이로부터 3개월 뒤 허리디스크가 터져 흘러내렸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리가 아픈 사람들일 테고, 내 경험담이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들추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2014년 한 해는, 내겐 참 많이 힘들었던 한 해다. 업무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결국 몸이 무너졌고, 공교롭게 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외삼촌도 많이 편찮으셨다. 외할머니께서는 투병 끝에 이듬해, 봄이 움트던 아름다운 때에, 결국 돌아가셨다.
옛말 하나 틀린 건 없었다.
"있을 땐 모른다"
없어져야 그게 얼마나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는지, 그게 얼마나 내 삶을 지탱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는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는 데 있는 걸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지냈는지,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걸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후회되는지..
성공? 기자로서의 성공한 삶이 어떤 건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도 없이, 대책 없이 열정만 가지고 열심히만 산다면 그런 명예가 주어질 것도 아니었다. 건강하지 않고선 성공도 없다. 막말로 성공했는데 병원에만 누워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무엇보다, 어리석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앞만 보며 사느라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가족들을 잊고 살았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가끔의 전화가, 이따금씩 만남에 얼마나 생색을 냈던가. "바빠 죽겠는데, 정말 어렵게 온 거야. 금방 가야 돼"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나는 오자마자 간다는 말부터 내뱉었다니..
이렇게 후회하면 뭐하나. "연지야~"라고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불러주던 외할머니는 더 이상 뵐 수 없고, 내 등을 어루만져주던 손길도 느낄 수 없다.
아버지도, 외삼촌도 정말 다행히 어려운 고비는 넘기셨지만, 그분들의 삶도,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삶도, 병을 알기 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영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저 모습이 마지막이면 어쩌지?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 내디뎠다간 그대로 땅 밑으로 쑥 꺼져버릴 것만 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성공해도 가족이 옆에 없다면, 건강하지 않으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는 이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잘 웃고, 잘 놀고, 밝고 항상 긍정적이던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웃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위축되고 부정적으로 변했을까. 1년에 감기 한 번 잘 안 걸리던 난데, 온갖 장기엔 염증, 용종을 달게 됐고, 척추 질환까지 얻었으니.
"잃었던 나를 찾아야겠다. 다시 나로 돌아가겠다" 마음먹었다. 반드시 건강해지고 가족한테 더 잘해야지. 가장 소중한 사람들 아닌가. 서른. 그렇게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나는 병원 대신 춤추러 간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병원 대신 춤추러 간다 (0) | 2020.04.11 |
---|